- Subject
- Marine Chronometer
- Period
- 1730 – 1773
- Class
- A — Verified
18세기 초의 항해사들이 마주한 가장 큰 미해결 과제는 위도가 아니라 경도였다. 위도는 태양의 남중 고도나 북극성의 각도로 비교적 쉽게 잴 수 있었지만, 경도는 시간의 차이로만 측정할 수 있었다. 출항지의 시각과 현재 위치의 시각을 비교해 그 차이를 각도로 환산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시계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것도 수개월 항해 동안 정확한 시각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707년 영국 해군 함대가 실리 제도 근해에서 위치를 잘못 계산해 좌초하면서 천 명이 넘는 수병이 목숨을 잃었고, 이 참사를 계기로 영국 의회는 경도법(Longitude Act)을 통과시켜 거액의 상금을 내걸었다.
이 상금을 끝내 손에 쥔 인물은 학자가 아니라 자수성가한 시계공이었다. 요크셔 시골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존 해리슨은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시계 제작 기술을 독학으로 익혔다. 그가 일생을 바친 작업은 배 위에서도 오차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휴대용 시계, 즉 해상 크로노미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가 차례로 완성한 네 개의 시제품 H1, H2, H3, H4는 지금도 그리니치의 왕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왜 시계가 항해 문제였는가
지구는 24시간에 한 바퀴 자전한다. 이를 각도로 환산하면 1시간은 경도 15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출항지의 정확한 시각을 알고 있고 현재 위치에서 정오의 정확한 시각을 측정할 수 있다면, 두 시각의 차이만으로 자신이 출항지에서 동서로 몇 도 떨어진 곳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원리 자체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학자 헴마 프리시우스가 이미 1530년에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리와 구현 사이에는 200년에 가까운 기술적 간격이 있었다.
이 간격을 만든 주범은 진자였다. 당시 가장 정확한 시계는 진자 시계였는데, 진자는 배의 흔들림과 온도 변화에 극도로 민감했다. 진자의 길이는 온도가 오르면 늘어나고 내리면 줄어들었으며, 배가 흔들리면 주기 자체가 흐트러졌다. 해리슨이 평생 동안 풀어내려 한 문제는 결국 두 가지였다. 진자를 대체할 시간 기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시간 기준을 어떻게 온도와 진동의 영향에서 분리할 것인가.
그리드아이언 진자와 그래스호퍼 이스케이프먼트
해리슨이 H1을 완성하기 전, 그가 육상용 시계에 도입한 두 가지 핵심 발명품이 있었다. 하나는 그리드아이언(gridiron) 진자로, 팽창률이 다른 두 종류의 금속 막대를 교차 배열해 온도 변화에 따른 길이 변화를 서로 상쇄시키는 구조였다. 다른 하나는 그래스호퍼 이스케이프먼트(grasshopper escapement)였다. 이는 진자에 마찰 없이 미세한 추진력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으로, 시계 내부의 윤활유 점도 변화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두 발명은 해상 환경의 가혹함을 견딜 수 있는 시계의 토대가 되었다.
40년에 걸친 네 개의 시제품
해리슨의 첫 해상 시제품 H1은 1735년에 완성되었다. 무게가 35킬로그램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 장치였지만, 리스본 시험 항해에서 놀라운 정확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H2(1739)와 H3(1759)를 차례로 만들었다. 특히 H3 제작에는 19년이 걸렸는데, 이 시제품에서 해리슨은 자신이 이전에 발명한 바이메탈 스트립의 원형을 처음 적용했다. 두 금속의 팽창 차이를 이용해 온도 보정 기능을 시계 내부에 내장한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 도약은 H4에서 일어났다. 1759년에 완성된 H4는 이전 세 모델과 달리 회중시계 크기였다. 지름 13센티미터, 무게 1.45킬로그램으로, 그때까지 누구도 회중시계 크기의 정밀 시계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던 시점이었다. 1761년 자메이카 시험 항해에서 H4는 81일의 항해 후 5초의 오차만을 보였다. 이는 경도법이 요구한 정확도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였다. H4의 제작 과정과 시험 항해의 상세 기록은 왕립박물관 그리니치(Royal Museums Greenwich)의 해리슨 시계 컬렉션 페이지에 정리되어 있다.
경도 위원회와의 분쟁
흥미로운 점은 해리슨이 상금을 받기까지 또 12년이 더 걸렸다는 사실이다. 경도 위원회는 H4의 정확도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라 요구하며, 해리슨에게 추가 복제품 제작을 강요했다. 그 사이 천문학자 네빌 매스컬린이 위원회의 핵심 인물로 들어왔는데, 그는 시계 방식보다 달 거리법(lunar distance method)이라는 천문학적 방식을 선호했다. 두 방식의 경쟁은 단순한 기술 논쟁을 넘어 학문적·계급적 갈등의 양상까지 띠었다. 결국 해리슨은 73세가 되어서야 국왕 조지 3세의 개입으로 상금의 잔여분을 받을 수 있었다.
해리슨 이후의 세계
H4의 성공은 항해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해리슨의 설계를 기반으로 한 라쿰 켄들의 K1 복제품은 제임스 쿡 선장의 두 번째 태평양 항해(1772-1775)에 동행했고, 쿡은 이 시계의 정확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H4를 우리의 충실한 안내자라 기록했다. 이후 토머스 언쇼와 존 아놀드 같은 후대 시계공들은 해리슨의 설계를 더 단순화하고 양산화했고, 19세기에 이르러 해상 크로노미터는 군함과 상선 모두의 표준 장비가 되었다. 해리슨 개인의 생애와 시계 제작 역사 전반에 대한 추가 정리는 위키백과의 John Harrison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로노미터가 가져온 변화는 단순한 항해 안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정확한 경도 측정은 정확한 해도를 가능하게 했고, 정확한 해도는 글로벌 무역과 과학 탐사의 토대가 되었다. 다윈이 비글호에서 갈라파고스를 관찰한 항해,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수에즈 운하 부지를 측량한 작업, 19세기 영국 해군의 해양 측심 사업은 모두 해리슨의 시계 없이는 불가능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 우리가 GPS 위성으로 위치를 잡는 원리도 본질적으로는 해리슨이 풀어낸 문제와 같다. GPS는 위성에 탑재된 원자시계의 시각과 수신기의 시각의 차이로 거리를 산출한다. 시간으로 위치를 찾는다는 발상 자체는 18세기 시계공의 작업장에서 처음 실증된 셈이다.
장인의 작업이 가지는 의미
해리슨의 사례가 오늘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는 그것이 학계의 컨센서스 바깥에서 풀린 거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왕립학회의 대다수 학자들은 천문학적 방식이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는 일정한 근거가 있었다. 천체의 운동은 수학적으로 모델링이 가능하고 누구나 관측 도구만 있으면 검증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었던 반면, 시계의 정확도는 한 개인의 장인적 솜씨에 좌우되는 사적 영역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문제를 해결한 것은 학자가 아니라 자기 작업장에서 40년을 보낸 시계공이었다. 이 사실은 한 영역의 권위 있는 견해가 곧 그 영역의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저널이 어떤 기준으로 정보를 검증하고 발행하는지에 대해서는 Team Colonial의 Field Manual 페이지에 상세히 정리해두었다.
해리슨의 H4는 지금도 그리니치 왕립천문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시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일부러 작동시키지 않는다. 워낙 정밀하게 제작된 부품들이 마모될까 우려해 보존 상태로만 전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지된 시계가 지금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정확한 시간이라는 추상이 어떻게 구체적인 금속과 톱니의 배치로 환원되었는지, 그리고 그 환원을 가능하게 한 한 사람의 집요함이 어떻게 인류의 항해 지도를 다시 그렸는지를 말이다. 한 개인이 평생을 바쳐 풀어낸 문제가 이후 두 세기 동안 무역, 군사, 과학의 모든 영역을 다시 그렸다는 사실은 기술사가 단순히 발명의 연대기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운다. 작은 부품 하나의 정밀도가 결국 대륙 간 권력 구조까지 재편할 수 있다는 점, 그것이 해리슨의 시계가 남긴 가장 깊은 교훈이다.